우리도 이제 다양한 민족의 문화가 섞여 공존하는 다문화 사회가 됐다. 하지만 곳곳에서 서로 다른 문화적 충돌로 인해 빚어지는 갈등이 사회문제로 부각되곤 한다. 코리안 드림을 품고 한국 땅에 이주해 발붙이고 살아가면 한국인이다. 이주민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나가야 하겠다.
동방의 ‘조용한 아침의 나라’로 불리던 조선이었다. 19세기에 와서도 우리는 흥선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으로 인해 서양 세계가 있는 것조차 모르는, 말 그대로 국제 정세에는 깜깜한 나라였다.
때는 이미 서세동점(西勢東漸) 시기로, 유럽 열강(列强)은 아시아 제국에 대한 식민지 쟁탈전이 한창이었다. 하지만 우리만이 잠자고 있었다. 조선은 한반도에서의 이권을 따내기 위한 외국 세력들의 각축장이 돼 갔다. 이러한 와중에서 1901년 조선에는 전에 없던 흉년까지 겹쳐 기아로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이 급증했다. 조정에서는 다급히 안남미(安南米) 30만 석을 수입했으나 미질이 불량해 보급조차 할 수 없었다.
이처럼 국민들이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던 시절, 우리의 미국 이민사(移民史)는 시작됐다. 미국 정부는 태평양 한복판에 떠 있는 섬, 하와이를 개발하기로 하고 조선 사람을 이민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미국 정부의 조선인 이민정책이 결정되자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주 경영자협회는 조선 주둔 미국공사 알렌에게 부탁, 미국으로의 이민을 고종 황제에게 건의토록 했다. 알렌 공사는 고종 황제를 만나 "현재 조선이 굶주리고 있으며 백성들 사이에 새로운 문화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이때에 미국에 이민을 보내 새로운 문화를 도입하고 돈을 버는 것이 바람직스럽다"는 뜻을 알렸다. 고종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와이 농장주 협회는 1902년 5월 9일 데슐러라는 사람을 이민 모집 대리인으로 지정, 서울로 파견했다. 서울에 도착한 데슐러는 알렌 공사로 하여금 조선 정부에 계속 타협을 보도록 독촉했으며, 그 결과 고종 황제는 미국 이민을 허가하면서 정부 안에 수민원(綬民院)을 설치토록 지시했다.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이민 업무를 다루는 기구가 창설된 것이다. 이로써 미국 이민 업무가 구체적으로 추진됐다.
수민원은 1902년 8월 20일 서울에서 첫 업무를 시작으로 인천·부산·원산 등지에서 사람들을 모집했다. 이민 모집은 여의치 않았다. 그때만 해도 백성들은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조상의 묘역이 있고 부모·형제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는 조국을 버리고 선뜻 외국으로 떠난다는 건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 당시 이민 모집 광고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기후는 온화하여 대단한 추위와 더위가 없으므로 각인의 기질에 합당함. 월급은 미국금전으로 매삭(每朔) 15원(일본금화 30원, 대한돈으로 57원가량)씩이요, 일하는 시간은 매일 10시간 동안이요, 일요일에는 휴식함.…"
광고까지 냈지만 지원자가 없자 데슐러는 선교사들을 동원, 교인들을 상대로 이민을 설득하기까지 했다. 조 헤버 존스(Geo Heber Jones)인천 감리교회 목사는 적극적인 이민 설득 작전을 편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걱정할 필요 없습네다. 하와이는 기후도 좋고 살기 좋습네다. 조선보다 먹을 것이 많이 있으며 잘 살 수 있습네다. 미국은 하나님 믿는 나라입네다. 아무 걱정할 필요 없습네다"라고 하면서 앞장섰다.
우여곡절을 거쳐 1902년 12월 22일 미국 하와이로의 첫 이민자 121명이 선발돼 인천 제물포항에서 일본 기선에 올랐다. 일행은 일본에 들러 신체검사를 받는 과정에서 20명이 탈락해 101명으로 줄었다. 이들은 미국 상선 겔릭호를 타고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했다. 또다시 외항에서 기다리던 위생관들에게서 철저한 위생검사를 다시 받아 이 가운데 8명이 불합격 판정을 받고 서울로 되돌아가야 했다. 최종적으로 이민자는 93명으로 더 줄어들었다. 이들이 한국인의 미국 이민 개척자들로 기록되고 있다. ‘한국 이민사 120주년’을 맞아 우리의 미국 하와이 첫 이민 여정을 약술해 봤다.